말할 수 없는 아이들의 권리
【에이블뉴스 원선애 칼럼니스트】 주호민 작가가 회색지대의 아이들을 위한 발달장애 대안학교를 설립하겠다는 기사에는 수많은 악플이 달렸다. 아직 교실 하나 지어지지 않았고, 어떤 아이가 그 문을 들어설지도 정해지지 않았는데 사람들은 벌써 돌을 들고 있었다. 내용보다 이름에 먼저 달려들어 무차별적인 비난을 쏟아내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오래전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코로나 직전, 큰아이가 초등학교에 막 입학했을 무렵의 일이다. 아이의 입학과 동시에 새로 부임한 특수교사가 있었고, 나는 학부모로서 무조건적인 지지와 신뢰를 보였다. 장애학생을 담당하는 교사들이 매일같이 마주해야 하는 격무의 무게와 그 좁은 교실 안에서 홀로 감내해야 하는 감정노동의 깊이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특수교육 현장은 언제나 인력이 부족하고 예산은 턱없이 모자라며, 학부모들은 어떻게든 교사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애쓴다. 내 아이를 온종일 맡아주는 고마운 존재를 감시하고 의심하고 싶어 하는 부모가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그 무렵, 우리 아이보다 한 학년 위였던 특수교육대상 학생에게 참으로 이상하고도 난감한 일이 발생했다.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오기만 하면 반복적으로 신체 중요 부위의 불편함을 호소하기 시작한 것이다.
몇 주 동안 같은 행동이 이어지자 아이 부모는 온갖 불길한 상상이 들었다. 혹시 화장실에서 남모를 사고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아니면 어떤 짓궂은 아이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하지만 아이는 자신이 겪은 일을 부모에게 온전히 설명해 줄 수 없었다. 어설픈 언어는 존재했으나, 목격한 사건의 인과관계를 정교하게 엮어 전달할 서사 능력이 없었다.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무슨 일을 당했는지 물어도 아이의 입에선 웅얼거림만 맴돌 뿐이었다.
장애아동을 키우는 부모가 가장 두려워하는 순간이 바로 이것이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신호는 분명한데, 그것을 증명할 방법도 없고 아이의 언어를 해석할 도리도 없는 먹먹한 순간. 결국 그 부모는 작은 녹음 기능이 숨겨진 시계를 아이의 손목에 채워 보냈다.
다행히 우려했던 화장실에서의 물리적 불상사는 없었지만, 진짜 충격은 엉뚱하게도 특수학급 교실의 평범한 일상 속에 있었다. 녹음 속 교사의 말들은 아이의 부적절한 행동을 교정하기 위한 지도가 아니라, 그저 인간적인 밑바닥 감정이 날 것 그대로 섞여 들어간 지독한 질책과 비난 일색이었다.
나는 그 녹음을 제삼자의 입장에서 직접 귀로 들었다. 내 아이의 일도 아니었건만, 누군가의 귀한 자식이 아무런 방어벽도 없이 온종일 그런 언어적 폭력에 노출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너무도 끔찍했다. 가장 괴로웠던 것은 그 교실의 공기가 너무나 평온하고 일상적으로 들렸다는 점이다. 마치 늘 그래왔다는 듯, 보는 눈이 없으니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당시 학기 중에도 학부모들 사이에서는 설명하기 어려운 불편함과 어색함이 종종 오갔고, 그 교사는 부임한 지 딱 1년 만에 인근 특수학교로 전근을 갔다. 더 놀라운 것은 그 사실을 전근 당일 학부모들에게 일괄 문자 통보를 했다는 점이다.
그때 비로소 깨달았다. 사람은 자신이 겪은 피해를 온전한 문장으로 고발할 수 있을 때에야 법과 제도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할 수 없는 아이들의 권리. (ChatGPT 활용 생성 이미지) ⓒ원선애
우리 사회는 철저하게 '증언'의 시스템 위에서 움직인다. 억울한 일을 당하면 논리적으로 설명해야 하고, 폭력을 당하면 육하원칙에 맞춰 신고해야 하며, 차별을 경험하면 정당한 절차를 밟아 항의해야 한다. 사법부든 교육청이든 모든 사회적 장치는 그 매끄러운 진술을 토대로 작동한다.
하지만 세상 모든 이들이 그런 세련된 문장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발달장애 아동이 그렇고, 표현의 감옥에 갇힌 중증장애인이 그러하며, 인지 기능을 잃어가는 노인들이 그렇다. 그들에게는 분명 경험과 고통이 존재하지만, 그것을 세상 밖으로 꺼낼 문장이 없다. 말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이들의 권리는 잘 보이지만, 말할 수 없는 이들의 권리는 증명할 수 없다는 이유로 너무나 쉽게 증발한다.
사람들은 냉소적으로 말한다. 증거를 가져오라고. 그러나 어떤 이들에게는 그 증거를 채집하는 행위 자체가 삶의 커다란 장벽이다.
수술실 CCTV 설치 논쟁을 떠올려보자. 의료계는 감시 환경이 의료 행위를 위축시킨다며 염려했지만, 대다수 국민은 설치 찬성으로 움직였다. 서로를 믿지 못하는 사회의 쓸쓸한 풍경일지언정,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자신을 지킬 수 없는 환자를 위한 최소한의 울타리가 필요하다는 절박함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매일 아침 가방을 메고 중학교 교문을 들어서는 아이의 뒷모습이 그 수술대 위의 환자와 겹쳐보이는 것은 나만의 착각인가.
그렇다면 왜 특수교실만큼은 그 어떤 예외도 허용되지 않는 닫힌 공간이어야 하는가. '교육적 신뢰'라는 말이 오직 어른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울타리가 될 때, 그 벽 뒤에서 스스로를 변호할 문장이 없는 아이들은 가만히 침묵을 견뎌낼 수밖에 없다.
주호민 사건이 진흙탕 싸움으로 번진 이유도 여기에 있다. 수많은 이들이 녹음의 위법성과 적법성을 따지고, 교권의 위축을 염려하며, 공교육 현장의 무너진 신뢰를 개탄한다. 다 맞고 아주 훌륭하신 말씀들이다. 하지만 그 고상하고 거대한 담론에는 정작 가장 무력한 당사자인 발달장애 아이들의 권리는 없다.
그렇기에 정책을 만들고 법을 주무르는 이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들이 그토록 원하는 대로 교실 내 녹음기를 원천 금지하고 나면, 그 청정구역 같은 교실 뒤편에는 도대체 무엇이 남는가. 말할 수 없는 아이가 밀폐된 공간에서 보이지 않는 상처를 입고 돌아왔을 때, 이 사회는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그 진실을 규명해 낼 것인가. 교사를 보호하는 장치들은 발 빠르게 논의되면서, 왜 아이를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망에 대해서는 다들 굳게 입을 닫고 있는가.
녹음기를 빼앗아 버린 뒤에도, 그 아이가 자신이 겪은 고통스러운 경험을 세상에 전달할 다른 통로가 존재하는가. 만약 대안도 없이 침묵만을 강요한다면, 그것은 사회가 가장 약한 자들에게 가하는 또 다른 형태의 세련된 폭력에 불과하다.
이 논쟁이 '학부모 VS 특수교사'의 대립으로 고착되는 것은 가장 위험하다. 그 순간, 구조의 책임은 개인의 갈등으로 축소되고, 가장 편한 사람은 결국 국가다. 아무것도 바꾸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특수학교 부족, 특수교육 인력 부족, 과밀 특수학급 문제, 교사 지원 체계의 부재, 장애아동 권리 보호 장치의 부족. 이 모두는 결국 국가와 교육당국이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다. 주호민 사건이 우리 사회에 남긴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말할 수 없는 사람의 말을, 이 사회는 어떻게 들을 것인가.
-장애인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대안언론 에이블뉴스(ablenews.co.kr)-
-에이블뉴스 기사 제보 및 보도자료 발송 ablenews@ablenews.co.kr-
출처 : 에이블뉴스(https://www.ablenews.co.kr)